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도연맹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제주도]] ===== 제주 지역에서는 [[6.25 전쟁]] 발발 이후 [[제주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오름, 해안가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당시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는 1950년 8월 4일 도내 4개 경찰서에 820명의 주민들을 예비검속했다고 한다. 그중 모슬포 경찰서 관할이었던 한림, 한경, 대정, 안덕 등지에서 374명이 검속되었고 이들 중 252명이 군(해병대)에 송치되었다. 한림지서에 검속된 63명은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1950년 8월 20일[* 이날은 음력으로 7월 7일, 칠월[[칠석]] 날이다.] 새벽 2시경 섯알오름 탄약고 터[* 이 탄약고 터는 1944년 말 [[일본군]]이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곳이다.]에서 집단총살당했다. 학살 당일 소식을 들은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다 군이 무력 저지하면서 수습을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6년이 지난 1956년 3월 30일, 유족들이 밤중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그 중 46구[* 나머지는 개인묘지에 묻혔다고 한다.]를 한림읍(당시 한림면) 금악리 갯거리오름 만벵디 공동장지[* 이 장지는 유족 중 하나가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한다.]에 안장했고 이 묘역을 만벵디묘역이라 부른다. 다른 149명은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했다가 같은 날 새벽 4~5시경에 집단 학살하였다. 장소인 섯알오름 터는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학살이 일어나 암매장 구덩이도 2개가 만들어졌다. 희생자 유족들은 나중에 한림지서 학살자들의 시신 수습 소식을 듣고 1956년 4월 28일에 시신 수습을 시도하였으나 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요구로 시신 발굴 허가를 받아 1956년 5월 18일 발굴을 통해 149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때 학살된 사람들 중 식별이 가능한 17구의 시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132구의 시신은 신원을 가려내지 못해서 한꺼번에 매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조상은 백 서른둘이 돼 자손은 하나니,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백 할아버지를 다 내 할아버지 모시듯 모시라'는 의미이다. 즉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어 뼈가 뒤엉켜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전부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이다. 하지만 1961년 6월 15일, 군사정권은 유족들을 협박하여 백조일손지묘비를 철거하고 23기의 묘를 강제 이장시켰다. 2005년 섯알오름 학살터는 4.3 유적지로 선정되었고, 2006년부터 학살터 정비사업이 추진되었다. 이후 2008년부터 백조일손유족회와 만벵디유족회가 공동으로 매년음력 7월 7일에 '예비검속섯알오름희생자영령 합동위령제'를 병행해 오고 있다가 2016년부터 각각의 묘역에서 제례를 지내기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